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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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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0.30 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독립영화 이야기)

<작은책> 2018년 11월호

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이선희 감독의 <얼굴, 그 맞은편>

 


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제 아들은 아주 특별합니다. 엄마니까 당연히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제 아들을 떠올릴 때마다 제 마음속에는 따뜻한 물 같은 것이 차오릅니다. 글을 모르던 시절, 어린이집에서 선생님들이 받아 적은 아들의 자기소개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빠의 귀를 닮았습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눈물 많고 걱정 많은 자기의 마음이 엄마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기는 아들의 생각에 많이 놀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아들은 아빠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합니다. 제가 앉아서 소변보기를 주장했을 때 순순히 따르는 아빠와는 달리 아들은 반발했습니다. 가끔은 엄마를 닮은 자기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더 강력한 남성성을 갖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들은 중2가 되었고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세계가 궁금해서 가끔 아들의 방에 들어가면 아들은 무심한 눈을 들어 ?” 하고 짧게 묻습니다. 선배 엄마들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반응에 상처받습니다. 여리고 고왔던 내 아들이 어느 순간 무서운 남자로 변해 있을까 봐 겁이 납니다.

이제는 같이 다니는 것도 반기지 않는 아들과 함께 제10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갔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일정이라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굴, 그 맞은편>을 보았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그리고 이 시기에 너무나도 적절하고 필요한 영화라 11월의 영화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시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지금은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가 화제가 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추석이면 멋진 달리기 솜씨로 구사인볼트라는 애정 어린 별명까지 얻었던 씩씩한 여성 연예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비는 영상은 모든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사회적 성취가 충분한 그 여성을 무릎 꿇게 한 것은 최종범이라는 이름의 미용사가 연인이었던 시절에 함께 찍은 영상 때문이었지요. ‘폭행 사건으로 신고되었다가 성관계 동영상 협박논란으로 번지면서,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네티즌이 2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동시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또한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여성주의자들은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합니다. ‘리벤지를 한국어로 번역한 복수라는 단어는 억울한 피해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게 보복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를 달고 불법 사이트들을 떠도는 영상들은 남성이 헤어진 연인에게 앙심을 품고 유포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그 영상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말을 붙이게 되면 영상 속 주인공 여성들이 잘못을 했다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알몸이 동의 없이 유포될 정도의 잘못을 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은 디지털 성범죄라고 부르자고 합니다.

▲ 영화 <얼굴, 그 맞은편> 포스터.


영화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찍혔는지 모른 채 사이버공간에 유출되어 사회로부터 라는 낙인과 함께 격리되는 여성들의 공포를 고스란히 체감하게 해 줍니다. 여성의 이미지를 착취해 수익을 얻는 시스템이 산업화되고 있지만 국가는 거의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가 비어 있는 이 자리에 서서 피해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젊은 여성들. <얼굴, 그 맞은편>의 주인공들입니다.

여성혐오페미니즘이 뜨거운 이슈가 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갈리아워마드가 등장했습니다. ‘미러링이니 폭력의 반사와 같은 단어들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제게는 버겁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복잡한 지형을 페미니즘=폭력이라는 공식으로 단순화하고 페미니즘을 사회악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간간히 대화를 하던 시절, “네가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제 바람을 들은 아들이 페미니스트가 뭔지 알아보겠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고 같은 부모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삼 남매는 서로 다릅니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돈 많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거?”라고 물었던 선생에 대해 분노를 털어놓는 큰딸, 탈코르셋 운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막내딸,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아들. 이런 상황에서 온 가족이 함께 본 <얼굴, 그 맞은편>은 저희 가족에게 대화의 물꼬를 터 주었습니다.

주인공들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의 젊은 여성 활동가들입니다. 그들의 시작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누군가의 사적인 동영상. 불법 유출된 것이 분명한데도 그 영상은 다양한 이름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떠돕니다. 불법으로 다운로드를 한 사람이 제목을 바꿔서 다시 올립니다. 고작 몇백 원, 몇천 원에 누군가의 신체는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활동가들은 영상 속 약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을 지켜보며 흥분하고 희열하는 남성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거리부스를 운영하기 위해 안내 배너를 세우는데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실수를 연발하며 깔깔거리는 이들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악마화된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페미니스트. 하지만 영화가 그려 내는 눈물 많고 공감 능력 풍부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장기를 따라가다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수십 개의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불법 유출 동영상을 찾아서 신고하고 또 신고합니다. 같은 동영상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올라와 있기에 일일이 다 확인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지만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피해자들은 동영상 유포 사실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를 해도 유포된 동영상을 다 막지 못해서 사비를 털어 디지털 장의사라는 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돈이 떨어질 때까지 지우고 또 지워도 막지 못한 피해자들 중의 일부는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더 절망스러운 것은 피해자의 불행이 알려지면 그 동영상은 더 인기를 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그만큼 충격적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불법 동영상 공유 사이트디지털 장의사라는 업체들의 협력관계가 의심된다는 사실입니다.

피해자들의 슬픔을 전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진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던 이선희 감독은 활동가들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활동가가 되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담아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영화를 보는 일 자체가 투쟁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성범죄 관련 기관이 법원에 영화상영금지가처분을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재판 기금 마련과 개봉을 위한 소셜펀딩이 진행 중입니다. 꼭 동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의: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cybersv.rc@gmail.com)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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