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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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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양회비정규직'에 해당되는 글 2

  1. 2019.05.27 어릴 적 부르던 교가, 기가 막힌다
  2. 2018.08.28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1

<작은책> 2019년 6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쌍용양회공업

 


어릴 적 부르던 교가, 기가 막힌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시아의 으뜸가는 양회공장의 우렁찬 기계 소리 메아리치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삼화초등학교 옛 교가. 양회공장은 시멘트 생산 기업인 쌍용양회공업()(이하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말한다. 340만 평 부지의 단일 공장으로 그 규모는 세계 최대. 쌍용양회는 국내 시멘트 업계 1위 기업으로 동해공장에서만 연간 1150만 톤을 생산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박준철 씨(43)는 아직도 교가를 잊지 않고 부를 수 있다.

교가에도 나오고 교과서에도 실리고 그랬어요. 잊어 먹지도 않아요. 그 노래를 그리 부르고 당겼으니. 기가 막힌다.”

그가 기막혀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박준철 씨와 그의 동료 문홍석(42), 태윤호(39) 씨를 삼화동 사무실에서 만나 공장을 둘러본 후 가까운 무릉계곡 한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준철 씨와 문홍석 씨의 아버지 역시 쌍용양회 동해공장 노동자였다. 해마다 망상 해수욕장에 쌍용양회가 직원 가족들을 위한 천막을 치면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가곤 했다. 성인이 되고 2002년 동해공장에 취직했지만 이들은 쌍용동해중기전문()(이하 동해중기) 소속 사내 하청 노동자다. 본래 쌍용양회의 중기 업무 부서였지만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하청업체로 분사됐기 때문이다. 동해중기를 포함한 하청업체는 모두 24. 중기 업무 노동자들은 불도저, 크레인, 로더 등 8가지 장비를 조종해 시멘트 제조공정에 맞는 원료 및 연료를 운반하고 투입하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보유한 건설 기계 조종사 면허만도 8가지. 정규직원과 업무상 다른 점을 물었다.

▲ 쌍용동해중기전문 사무실 입구. 부지와 사무실 모두 쌍용양회가 무상 제공해 오다 노조가 생긴 후 임대료를 받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아까 정문에 정직원들 보셨죠? 우리하고 옷도 마크도 똑같아요. 정직원들은 현장 점검만 하고 나와서 우리한테 작업 지시를 하는 거죠. 여기 이래이래 해 주세요. 그게 다예요. 위험한 건 하청이 다 해요.”

이들은 소속 회사가 위장도급 업체라고 주장한다. 원청인 쌍용양회의 지휘·감독을 받아왔고 독자적으로 사업체를 경영할 만한 자금 조달 능력도, 전문기술도 없다는 것이다. 중장비와 사무실 및 부동산도 모두 쌍용양회 소유고, 대표이사도 쌍용양회 퇴직자다. , 동해중기의 최근 4년간 평균 매출액은 약 38억 원인데, 노동자들은 도급비가 매출액이라고 주장한다. 동해중기의 최근 4년간 평균 영업이익도 약 2900만 원뿐이다. 노동자 36명이 검찰에 고소한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등 위반자료에 따르면 (동해중기) 설립 당시 기본급과 상여 등 임금성 급여는 쌍용양회의 78퍼센트 수준으로 정하기로 하였으며, 기타 복지와 성과금은 쌍용양회와 동일하게 지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처음 한동안은 쌍용양회에서 성과금 받으면 우리도 똑같이 나왔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더라고.”

성과금이 중단된 시기는 2011. 동해중기로 이직한 쌍용양회 전적자들이 쌍용양회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하고부터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잘해 주겠지, 회사에서 줄 건 주겠지 생각했어요.”

365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서 이들은 주야 3교대로 일했다. 이들의 안내로 둘러본 현장은 위험천만했다. 시멘트 원료를 섭씨 1450도로 가열하는 킬른이라 불리는 거대한 소성로와 회전 분쇄기, 8킬로미터 길이의 클링커(시멘트 반제품) 운송 벨트가 눈에 띄었다. 박준철 씨가 말했다.

제가 입사하고 예닐곱 명 죽었어요. 보통 벨트에 끼거나 떨어지는 사고예요. 고 김용균 씨(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 석탄운송설비 업무)랑 똑같아요.”

이들은 중장비로 연료를 호퍼에 밀어 넣다 빠진 적도 많다. 호퍼는 깔때기처럼 생긴 연료 투입구다.

호퍼가 되게 깊고 넓어요. 야간에는 시야 확보가 안 돼서 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탁 떨어지면 이마 박고 많이 다치죠. 혼자서 일하니까 꼭 무전기 갖고 타요.”

무전기로 다른 장비를 호출해 견인해서 겨우 나오지만 빠질 때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여름에는 에어컨 가동도 못 한다. 폭염 속 킬른에서 나오는 열이 더해져 엔진 과열로 장비가 터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작업장은 폐기물 저장고. 부연료로 폐기물이 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폐타이어 사용부터다. 2000년대부터는 농촌폐비닐, 플라스틱 등 생활 쓰레기와 산업폐기물도 공장에 반입됐다. 둘러본 저장고는 쓰레기 소각장과 똑같은 악취가 진동했다. 미세한 폐비닐 조각들이 둥둥 떠다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5분밖에 머물지 않았는데도 목이 쾨쾨했다. 동해중기 노동자들은 저장고 작업 중 토한 적도 많다. 또 거의 대부분이 피부질환, 안과 질환, 비염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되게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피부가 너무 가려우니까. 비염도 다들 생겼어요. 어릴 때는 없던 거죠.”

쌍용양회는 이를 순환자원 재활용’, ‘에너지 절약 및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자발적 협약의 시범 사업장이라며 환경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최근 쌍용양회가 유기 슬러지(하수종말처리 최종 잔재물로 유해물질 함량이 높다)까지 반입해 연간 6만 톤 소각을 계획하자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진 것. MBC강원영동 보도에 따르면 쌍용양회가 슬러지 1톤당 받는 보조금은 10만 원. 6만 톤을 모두 소각할 경우 연간 60억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현재는 주민들의 반발로 슬러지 반입이 유예됐다.

▲ 삼화동 주민들이 쌍용양회를 규탄하는 펼침막을 걸었따. 삼화동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작은책(정인열)

위험한 작업 환경과 오염물질에 노출되면서도 박준철 씨를 비롯한 중기 업무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아 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시급이 대폭 인상되었지만 임금인상 효과는 사실상 없다. 주휴수당 등 각종 수당이 기본급에 산입되고 임금 보전도 없이 특근 시간마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쌍용양회 원청은 매출액 164백억여 원, 영업이익 24백억여 원(2015~2017년 평균)으로 막대한 이익을 쌓았지만 동해중기 하청 노동자들의 성과금을 없애더니 2017년에는 임금마저 동결했다.

원청 노조가 임금인상을 하면 우리는 그다음 해에 인상분을 소급해서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끊어 버렸어요. (동해중기) 사장한테 물어보니 하는 얘기가 양회에서 안 준대. ’. 더 이상 묻지도 말라는 거예요.”

최저임금 지급에 임금동결까지 벌어지자 노동자들은 참을 수 없었다. 노동자 36명 전원이 20181월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에 가입하고 쌍용양회지회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상급단체를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으로 변경했다.) 하청업체 중 가장 먼저였다. 지회는 20186월 쌍용양회와 동해중기를 불법파견으로 검찰에 고소했다. 강릉고용노동지청은 불법파견으로 판단, 지난 322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그동안 지회는 1인시위부터 공장 앞 집회, 시내 집회까지 쉬지 않고 투쟁했다. 강원지역 타 사업장과 연대도 적극적으로 했다. 이들은 동해공장 앞에 모든 하청은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펼침막을 걸었다.

우리만 잘 먹고 잘살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잘되면 다른 업체들도 노조할 권리는 사실상 보장되는 거고요. 제조업 자체가 사실상 정규직이거든요.”

쌍용양회지회의 영향으로 중장비 정비 업무를 하는 쌍용동해정비() 소속 하청 노동자들도 20187월 노동조합을 설립해 투쟁하고 있다.

▲ 쌍용양회 하청 노동자 태윤호, 문홍석, 박준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중기 업무 노동자들의 요구는 직접고용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이다. 원래 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원청 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이 많은 쌍용양회지만 향토기업으로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쌍용양회 동해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겨울철에 쌍용양회 깃발을 꽂고 동해시 제설 작업을 다녔다. 여름철에는 해변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도 나갔고, 학교 운동장 골대도 옮겨 주었다. 이렇게 동해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지역 주민인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직원들도 다 저희하고 불알친구들이고 동네 이웃이에요. 뒤에 와서 진짜 잘하고 있다 응원해 주고, 우리 입장 다 이해해 주죠. 동네 주민들도 고생한다고 응원 많이 해 줘요.”

박준철 씨가 부르던 삼화초등학교 교가는 세월이 흘러 양회공장(동해공장)’ 가사가 빠진 채 바뀌었다. 삼화동 주민들과 하청 노동자들은 쌍용양회를 규탄하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박준철 씨가 어릴 적 선망하며 부르던 교가를 이제 와서 기가 막히다고 하는 이유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태윤호/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지부 사무국장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분이라면 쌍용양회 시멘트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일 공장 중 세계 최대 규모 쌍용양회공업()은 시멘트업계 1위로 연간 300~400만 톤의 시멘트를 미국, 칠레,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8곳에 수출하는 회사다.

2007년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그해 결혼하고 겨울에 쌍용동해중기()에 입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지인분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년실업률이 점점 높아지는 시기에 젊은 나이에 지방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는 평생직장으로 삼을 만한 일터가 별로 없다. 지방에서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권, 대도시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쌍용양회에 들어간 나는 내가 자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2의 인생, 나의 새 둥지를 꾸려 갔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덟. 결혼하고 입사한 지 12년 차.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정말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IMF 이후 쌍용양회는 쌍용중기 부서를 포함한 기계, 정비, 유통 등 여러 개의 부서를 도급으로 전환시켰다. 이 내용을 입사 면접에서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다시 안정화되면 합병될 거라고 기대하였고 다른 타 회사의 대우를 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처음 원청 직원과 월급 차이는 78퍼센트 수준이었고 성과급 및 복리후생도 쌍용양회의 지침 그대로 적용되었다. 분사되었을 때 양회 직원으로 일하다가 넘어온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원청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4년쯤 지났을 때 바지사장이 갑자기 원청에서 퇴직 통보가 왔다고 했다. 왜 바지사장인가 하면 연 35~40억 원의 경상 도급을 받아 오는 회사의 사장 자리에 주주총회도 거치지 않고 원청이 보내는 사람을 앉혀 처우, 복지나 직원들의 급여 및 발령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쌍용양회 북평공장 공장장(부장이사)이 중기 바지사장으로 온다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그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기 반장이 도급계약에도 없는 A광산에서 비 오는 날 원청 관리자의 요청으로 작업자 두 명과 중장비를 가지고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낙석 사고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 우린 원청의 작업 지시를 당연시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달이 흐르고 쌍용양회에 계시다 넘어오신 퇴직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쌍용양회의 입사 동기들과 퇴직금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소송을 했다. 한평생을 다 바치고 억울하게 회사의 고통을 공동 분담 하였는데도 그들과 평등한 대우는커녕 물질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은 1심에서 지게 된다. 원청에서 도급으로 넘어올 때 아무런 서명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이어져 넘어온 것이 실수였다.

그 후폭풍이 결국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바지사장은 원청에 의해 잘려 나가고 그보다 더한 바지사장(북평공장 공장장)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한번은 원청 관리자가 자신들의 작업 지시를 묵살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여 바지사장이 동료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분은 한 달 무급과 출입 정지 공문을 받고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사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야만 했다.

또 외부 운송업체 기사가, 우리가 하역을 제때 안 해 준다고 쌍용양회에 본사에 투서를 보내 본사에서 감사조사원이 내려와서 그 시간대 근무였던 장비 운전원을 불러 감사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말에 원청 노조가 임금 협상을 하여 임금이 인상되면 우리도 똑같이 올려 줬는데, 도급이라고 끊기고 소급분도 안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겨울에는 동해시의 도로 일대, 공장 주변, 시내, 공장 안, 원청 사원아파트 앞까지 요청 오는 제설 작업은 다 했고 여름에는 원청 직원의 피서를 위한 천막과 의자 운반까지 했다. 동해시의 초··고등학교 운동장과 바닷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 등 쌍용양회의 중장비 관련 대외 업무는 우리가 도맡아 했다. 억울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발급한 건설기계 조종면허를 8개씩 가지고 있으며, 실제 그 면허에 해당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능직 사원들이다.

정말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 이 악질 같은 놈들은 조금 더 벌어먹으려고 직원들 임금 줄여 지네 배 불리고, 원청에 잘 보여 어떡하면 안 잘릴까 온통 그 생각뿐인가 보다. 누군가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를 열어 연구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머리를 깨 봐야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본에 맞서기 위해 SNS를 뒤져 우리랑 유사한 회사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 동네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승리한 사례를 보았다. 동해삼척지역에는 노동운동에 앞장서 그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난 110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쌍용양회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의 반대편에 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걱정했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느라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직원들의 한마음 한뜻이면 한 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다들 이런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런 일들이 생기면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나 위로가 그렇게 따뜻하고 위대할 순 없을 것 같다.

▲ 쌍용양회 비정규직 노동자 태윤호 씨.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지금 우리는 쌍용양회의 불법파견 및 위장도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 중이다. 노동운동의 선전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투쟁은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부림이며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의 일손을 놓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이 글을 보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 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쌍용양회지부와 강원지역 노동자들.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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