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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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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1.28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작은책 2018년 12월호)1

작은책 2018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요즘 텔레비전에서 양진호가 사람을 철썩철썩 때리는 걸 보는데 갑자기 내 볼때기가 저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때리면 무척 아픕니다. 너무 아파서 더는 안 맞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요. 빌라면 빌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요. 보복은 엄두도 못 냅니다. 때리는 손은 너무 크고 무서워서, 법보다, 정의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작동하거든요. 그래서 나처럼 겁이 날 만큼 맞아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작은책>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뒤로,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오래 연락이 끊겼던 이들이, 할까말까 하는 망설임을 뚫고 기꺼이 기별을 넣어 볼 엄두를 내는 까닭 역시 불쌍한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지안이한테 이런 말을 하지요. 네가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불쌍하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너무 우뚝 서서 너무 빛나고 있으면, 아무리 반가워도 금세 기별 넣는 행동으로 이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차라리 불쌍한 처지여서, 내 좋은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 참 안심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씩씩하게 살고 있는지, 할 말 다 하고, 뻘짓 다 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해 두지 않으면, 내 전화통에 불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결혼 생활을 접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혼자 갓난쟁이를 돌볼 길이 없어 부산 본가에 아이를 맡겨 둔 채, 서울-부산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무사히 수행하고, 그때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던 아이 아빠와의 전투(?)에서 당당히 이겨 내려면 몸이 튼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사무실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등록을 했습니다. 나는 물을 참 좋아합니다. 물 마시는 것도 좋고, 팔 할이 물인 술도 좋고, 물속에서 노는 것도 좋고, 나이 들면 물가로 가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신나게 수영을 다니다 생리 기간이 닥쳐왔습니다. 전화를 걸어 생리 기간이라, 잠깐 쉬었다가 다시 다닐게요.” 했더니 안 된답니다. 아무도 그런 까닭으로 수영장을 쉬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정히 오기 힘들면 진단서를 떼 오세요.” 나는 벌컥 화가 났습니다. 아니, 생리가 어떻게 병입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제가 건강해서 생리를 하는 거니까요. 생리 기간 일주일 동안 잠깐 쉴 수 있게 안 해 주시면, , 그냥 가지요. 수영장에 가면 물에다 사람들이 눈물에, 콧물에, 침도 뱉고, 오줌도 싸고 그러는데, 생리혈 하나 더 보태는 게 이상할 것도 없겠네요.”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불쾌감을 준다나요? 이렇게 황당할 데가 또 있습니까?

내가 다닌 수영장은 현대 계동사옥 지하에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길이랑 브이아이피(VIP)들이 드나드는 길이 아예 달랐습니다. 아마 여러 처우들도 많이 달랐겠지요. 이게 그러니까,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고 여자일 뿐이라서 당하는 일이다 싶으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가임기 여성은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그 기간이 엄연함에도, 남자들과 한 달 정기권 금액이 같은 건 옳지 않다, 쿠폰제로 운영하거나, 생리 기간에 수영을 잠시 쉬었다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같은 기간이라면 여자들 정기권 금액이 더 싸야 한다는 취지를 담아서 말입니다. 그 뒤로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이 내용이 반영되어서, 공공이 운영하는 수영장에 생리할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아시겠지요?

또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내몰고 새로운 지도자로 바꾸어 냈을 즈음, 나도 ()적농단을 몰아내고 무혈혁명을 이뤄 냈더랬습니다. 딸아이 성을 엄마인 내 성으로 바꾸었거든요. 이게 무슨 혁명인가 싶겠지만, 진짜 피만 안 흘렸지, 성 하나 바꾸는 데 참 욕 많이 봤습니다.

딸아이랑 다시 같이 살게 되면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시대 새 이름을 지어 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이런저런 이름들이 후보로 나왔는데, 처음 우리 둘 다 흡족해한 이름이 이송이였습니다. 내 성이 씨니까, 성이랑 이름을 붙이면 송이송이’! 뭔가 좋은 기운이 송이송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또 하나 눈에 확 들어온 이름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내가 만들던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느림 작가가 연재하는 덕분이와 장판이의 한뼘텃밭이라는 꼭지가 있었거든요. 딸아이랑 같이 사는 게 참 좋은 일이니, ‘네가 좋은 건 내 덕분이고, 내가 좋은 건 네 덕분이다. 이 이름만 한 게 없다싶었지요. 물론 도시내기 딸아이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이름입니다.

내가 원래는 아이를 셋 갖고 싶었는데, 그 녀석들이 다 씨가 달랐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 지어 뒀거든요. 첫째가 마루.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가장 밑바닥을 받쳐 주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둘째는 지붕이. ()을 알아주는 벗()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집으로 치면 적잖이 떨어져 있으니, 셋째는 기둥이라고 지어서 마루와 지붕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하나 낳고도 내가 이토록 헤매는 꼴을 보고 얼른 주제파악이 돼서 마루라는 이름밖에 못 쓴 겁니다. 그래, 지붕이나 기둥이 가운데 하나는 어떠냐?”고 딸아이한테 물었지요. 하지만 이 녀석, 잠시 틈도 갖지 않고 싫어!” 합니다.

결국 녀석이 하자는 대로 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불러 줘서 익숙한 지금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꾸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바꾸려고 보니,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의 성과 본 변경 허가 신청소송에서 이겨야 된다는데, 이게, 준비하는 서류부터 복잡합니다. 왜 성을 바꾸고 싶은지, 성을 바꿔 쓴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일상에서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 이를 왜 재판부가 허가해 주어야 하는지 들에 대한 내용을 쓰고, 필요한 증거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가까스로 서류를 꾸며서 판사 앞에 섰더니, 내게 묻는 첫마디가 재혼하려고 그러세요?”였습니다. 엄마가 재혼해서 아이 성을 새아버지 성으로 바꾸는 게 보통인데, 재혼도 안 하면서 멀쩡한 아이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아이 생부 의사가 어떤지도 확인해야 하고, 가사 조사에, 심리에 절차가 아주 복잡하다는 겁니다.

상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성 문제는 자기 결정의 권리이지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생부 의사까지 물어야 하다니. 그 생부의 생사도 알지 못하던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를 딸아이 친구들한테 하소연하니 이 녀석들도 같이 분개하면서, ‘내 친구 이름은 송OO입니다하는 피켓을 펼쳐듭니다. 이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탄원서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졸업 앨범에 OO’으로 표기해 주었고, 아이가 물건에 쓴 이름에, 일상생활에 엄마 성을 쓰고 있다는 증거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서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성 변경 허가 판결을 받은 것은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고도 석 달이 지나서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이 마흔 넘은 육중한 몸을 얼마나 폴짝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마시면 기운이 팡팡 나는 자양강장제 박카스를 잔뜩 사서 바까스로 바꿔 둘레에 돌리던 그날의 상큼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이 성 하나 바꾸는 데 일 년 넘게 싸웠으니, 촛불혁명보다 더 질기고 오랜 혁명이었지요.

▲ 그림_ 최정규


,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진 걸 함부로 쓰고, 나쁜 짓 하는 놈한테는, 있는 힘 없는 힘 다해 이겨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럴 땐 상식 없는 게 진짜 큰 무기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거든요.

이렇게 힘자랑이 길어진 것은, <작은책> 보고 걸려 온 전화 몇 통에 마음이 속절없이 따땃해져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철벽을 거두게 되는 건, 갑질과 겁박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측은해하는 마음, 다정히 헤아려 주는 마음들 때문이잖아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인 것처럼요.

물론 그러다 철벽이 홀라당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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