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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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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8)

 

이만큼 했으면 다 한 거지 뭐!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오늘 딸아이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면접을 다녀왔습니다. 고등학교라니! 써 놓고 보니 더 낯섭니다. 아이가 가고 싶은 학교는 본인뿐 아니라 학부모도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도 봐야 하는 곳입니다. 면접에 임한 선생님들이 어찌나 푸근한지 하마터면 퍼질러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을 뻔했습니다. 들어갈 때 사교육 포기 각서를 쓰게 하는 고마운 학교라서 꼭 붙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자소서에 면접까지 마치고 나니, 할 일을 다한 기분입니다. 붙으면 너무 좋겠지만, 떨어져도 이제부터는 뭐 자기 인생이지요. 좀 더 건강한 환경에서 입시 준비 따위 말고 정말 배움이 있는 공부 시키고 싶어서 부린 욕심은 딱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혼자 키우는 동안 아이는 내게 늘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갓난쟁이일 때는 젖 물리고 똥오줌 닦아 주며 생존시키는 그 자체가 하루하루 도전이었지요. 제 발로 걷고 밥 먹고 할 때부터는 먹고사는 일, 집안 살림, 육아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것이 도전 과제였습니다.

미션클리어해 가면서 레벨 업되었던 시간을 가만 돌아봅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다 하려면 다른 사람하고 연결될 여력이 없어지는 게 당연한데요. 내 경우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그리고 방학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엄마 부재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늘 누군가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딸아이 말마따나, 엄마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거니까, 민폐를 끼치고 은혜를 갚고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어떤 때는 끼친 폐가 많아 약소한 은혜 갚음으로는 갚아지지 않기도 했고, 어떤 때는 작은 민폐에 너무 많은 죄책감으로 자폐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그 균형이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마는, 덕분에 혼자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고, 뜨겁고 진한 관계망들이 도처에 생긴 것 같습니다.

딸아이 레벨도 많이 높아졌는데요. 첫째로, 아기 때는 어린이집에 가장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오는 신세다 보니 감기며 중이염이며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감기 한번 심하게 앓지 않으니 몸이 많이 좋아졌지요. 둘째로, 터진 입으로 못하는 말이 없고, 튀어 오르기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다가 말도 제법 가려 하게 되고, 문도 살살 닫고, 화도 덜 내고, 급기야 좋은 마음이 들 때는 좋은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합니다. 이 녀석이 한번 구기면 너덜너덜해지는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생긴 모습 그대로 다시 튀어 오르는 용수철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레벨 업 되는 과정을 쓰다 보니 어느새 이번이 마지막 연재 글입니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몇 날 며칠은 떠들 수 있지, 책이 몇 권은 나오지 싶었는데, 실은 <작은책>에 한두 번 말하고 나니 당장 밑천이 바닥이 났더랬습니다. 이 앙상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추향 씨는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동생이 둘 있고, 집이 너무 못살았다. 송추향 씨 어머니는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역시 못살았지만 자기 아버지 몫으로만 올랐던 쌀밥을 받아먹을 수 있을 만큼 귀하게 자랐다. 그러다 결혼해서 송추향 씨를 임신했을 때 밀감이 먹고 싶었는데 살 돈이 없어서 밀감 껍데기를 씹어 먹었다고 했다.

송추향 씨 아버지 또한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집이 못살았다. 장남이지만 공부가 싫어서 집을 뛰쳐나가 부산에서 노가다를 하며 살다가 결혼해서 송추향 씨를 가졌다. 여전히 너무 못살아서 그 고단함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아내와 자식에게 풀고 살았다. 그러다 2002년 암에 걸려 비로소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송추향 씨 아버지의 노동 해방은 어머니의 노동 굴레로 넘겨졌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건물 청소를 하고, 낮에는 아이나 어르신을 돌보고, 보육 교사를 하고, 간간이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다 콩팥에 병을 얻어 일주일에 이틀 투석하는 동안, 비로소 쉰다. 아직 노동에서 해방되지는 못하고 여전히 새벽에는 건물 청소를 하고, 주말에는 아이 돌봄을 한다.

송추향 씨는 부모가 아직 젊을 때에 독립을 해서 식구들하고 크게 상관없이 살다가 18년 전에 아이를 가져 이듬해에 낳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몰라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가 대학생은 육아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길로 송추향 씨의 수정란에서 정자의 지분을 갖고 있는 한 남자를 불러다가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그 남자가 아팠다. 몸이 아프자 정신도 황폐해져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 송추향 씨는 어느 날 1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접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안중에 없었던 부모님 집에 아이를 맡기고 날마다 서울로 출근하고 부산으로 퇴근하며 살았다. 송추향 씨 전남편이 불쑥 부산 집에 나타나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송추향 씨 부모님은 군말 없이 손녀를 보내 주었다.

송추향 씨가 다시 아이를 되찾아올 때까지는 5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싸우고 어르고, 법정 다툼까지 한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송추향 씨 딸은 아빠한테 많이 시달리며 살았다. 다시 돌아온 딸은 욕도 잘하고 화도 잘 내고 무엇보다 슬픔이 컸다. 그 쏟아 내는 것들 앞에서 쩔쩔매면서 송추향 씨는 다 받아 줄 거야라고 허풍을 떨었다. 그것이 허풍이었다는 것은 급격히 하얗게 센 머리칼 때문에 다들 눈치챌 수 있었다. 송추향 씨는 딸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건너온 표식을 달아 주고 싶었다. 딸의 성을 송추향 씨 성으로 바꾸었다.

송추향 씨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적은 없다. 하지만 스무 살이면 사람은 자기 밥벌이하며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기 몸에 아기가 생겼을 때, 그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 혼자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 아이는 생긴 이상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잘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생물학적 지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송추향 씨가 여자니, 아이는 당연히 딸이라고 생각했다. 생리 기간에 수영장에 오지도 말라고 하고, 돈도 환불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남녀 차별이라고 인권위에 제소했다. 엄마가 키우면 자식은 엄마 성을 붙이는 것이 맞다고 믿고, 나중에 그 자식이 크면 자기 스스로 이름을 붙여 살기를 바란다.

그 딸이 지금까지는 엄마가 자기 눈치를 200만큼 보다가 이제는 자기 눈치를 100밖에 안 본다며 불만을 표시할 때, 송추향 씨는 자기가 딸 눈치를 200만큼 보는 줄을 알아줘서 고마워했다. 또 자기가 딸 눈치 보는 일이 100으로 줄었을 때, 나머지 100은 딸이 자기 눈치를 보아 주는 거라고 여겨서 고마워했다.

혼자 날아다니며 살 것 같았던 송추향 씨는, 상태가 좀 괜찮아진 사춘기 딸과 이제는 늙고 병든 부모님이 안중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는 날아다니지 못하고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엊그제 딸한테서 엄마는 혼자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날씨가 흐린 것 같다고 하더니, 오늘 고등학교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이 딸아이한테 너에게 엄마란?’ 하고 물었는데 고마운 존재라고 답했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듣고, 날씨가 참 좋다고 했다.

 

A4 용지 달랑 한 장이면 끝날 이 얄팍한 삶을 열여덟 번에 걸쳐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찮은 이야기에도 두 눈을 반짝, 두 귀를 활짝 해 주는 <작은책> 독자님들 덕분이었습니다. 맨날 마감이 늦어 이쁜 이분 언니, 분이 나게 만들어서 미안했어요. 의식에 흐름에 따라 늘어놓는 구멍 숭숭 난 이야기에 늘 안성맞춤의 그림으로 단단히 메꾸어 주신 최정규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림_ 최정규


내가 열여덟 번에 걸쳐서 쓴 것들은, 모두 그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책> 독자님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쓰는 일의 무거움이 사라졌으니, 듣고 나누러 다니겠습니다. 특히 나에게 힘껏 말을 걸어 주신 해옥님, 대구여자님, 채민님, 정희님, 은숙님, 서해님. 아직도 괜찮다면, 늦더라도 꼭 갈게요!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요즘 텔레비전에서 양진호가 사람을 철썩철썩 때리는 걸 보는데 갑자기 내 볼때기가 저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때리면 무척 아픕니다. 너무 아파서 더는 안 맞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요. 빌라면 빌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요. 보복은 엄두도 못 냅니다. 때리는 손은 너무 크고 무서워서, 법보다, 정의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작동하거든요. 그래서 나처럼 겁이 날 만큼 맞아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작은책>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뒤로,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오래 연락이 끊겼던 이들이, 할까말까 하는 망설임을 뚫고 기꺼이 기별을 넣어 볼 엄두를 내는 까닭 역시 불쌍한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지안이한테 이런 말을 하지요. 네가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불쌍하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너무 우뚝 서서 너무 빛나고 있으면, 아무리 반가워도 금세 기별 넣는 행동으로 이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차라리 불쌍한 처지여서, 내 좋은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 참 안심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씩씩하게 살고 있는지, 할 말 다 하고, 뻘짓 다 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해 두지 않으면, 내 전화통에 불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결혼 생활을 접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혼자 갓난쟁이를 돌볼 길이 없어 부산 본가에 아이를 맡겨 둔 채, 서울-부산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무사히 수행하고, 그때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던 아이 아빠와의 전투(?)에서 당당히 이겨 내려면 몸이 튼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사무실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등록을 했습니다. 나는 물을 참 좋아합니다. 물 마시는 것도 좋고, 팔 할이 물인 술도 좋고, 물속에서 노는 것도 좋고, 나이 들면 물가로 가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신나게 수영을 다니다 생리 기간이 닥쳐왔습니다. 전화를 걸어 생리 기간이라, 잠깐 쉬었다가 다시 다닐게요.” 했더니 안 된답니다. 아무도 그런 까닭으로 수영장을 쉬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정히 오기 힘들면 진단서를 떼 오세요.” 나는 벌컥 화가 났습니다. 아니, 생리가 어떻게 병입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제가 건강해서 생리를 하는 거니까요. 생리 기간 일주일 동안 잠깐 쉴 수 있게 안 해 주시면, , 그냥 가지요. 수영장에 가면 물에다 사람들이 눈물에, 콧물에, 침도 뱉고, 오줌도 싸고 그러는데, 생리혈 하나 더 보태는 게 이상할 것도 없겠네요.”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불쾌감을 준다나요? 이렇게 황당할 데가 또 있습니까?

내가 다닌 수영장은 현대 계동사옥 지하에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길이랑 브이아이피(VIP)들이 드나드는 길이 아예 달랐습니다. 아마 여러 처우들도 많이 달랐겠지요. 이게 그러니까,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고 여자일 뿐이라서 당하는 일이다 싶으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가임기 여성은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그 기간이 엄연함에도, 남자들과 한 달 정기권 금액이 같은 건 옳지 않다, 쿠폰제로 운영하거나, 생리 기간에 수영을 잠시 쉬었다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같은 기간이라면 여자들 정기권 금액이 더 싸야 한다는 취지를 담아서 말입니다. 그 뒤로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이 내용이 반영되어서, 공공이 운영하는 수영장에 생리할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아시겠지요?

또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내몰고 새로운 지도자로 바꾸어 냈을 즈음, 나도 ()적농단을 몰아내고 무혈혁명을 이뤄 냈더랬습니다. 딸아이 성을 엄마인 내 성으로 바꾸었거든요. 이게 무슨 혁명인가 싶겠지만, 진짜 피만 안 흘렸지, 성 하나 바꾸는 데 참 욕 많이 봤습니다.

딸아이랑 다시 같이 살게 되면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시대 새 이름을 지어 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이런저런 이름들이 후보로 나왔는데, 처음 우리 둘 다 흡족해한 이름이 이송이였습니다. 내 성이 씨니까, 성이랑 이름을 붙이면 송이송이’! 뭔가 좋은 기운이 송이송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또 하나 눈에 확 들어온 이름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내가 만들던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느림 작가가 연재하는 덕분이와 장판이의 한뼘텃밭이라는 꼭지가 있었거든요. 딸아이랑 같이 사는 게 참 좋은 일이니, ‘네가 좋은 건 내 덕분이고, 내가 좋은 건 네 덕분이다. 이 이름만 한 게 없다싶었지요. 물론 도시내기 딸아이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이름입니다.

내가 원래는 아이를 셋 갖고 싶었는데, 그 녀석들이 다 씨가 달랐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 지어 뒀거든요. 첫째가 마루.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가장 밑바닥을 받쳐 주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둘째는 지붕이. ()을 알아주는 벗()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집으로 치면 적잖이 떨어져 있으니, 셋째는 기둥이라고 지어서 마루와 지붕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하나 낳고도 내가 이토록 헤매는 꼴을 보고 얼른 주제파악이 돼서 마루라는 이름밖에 못 쓴 겁니다. 그래, 지붕이나 기둥이 가운데 하나는 어떠냐?”고 딸아이한테 물었지요. 하지만 이 녀석, 잠시 틈도 갖지 않고 싫어!” 합니다.

결국 녀석이 하자는 대로 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불러 줘서 익숙한 지금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꾸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바꾸려고 보니,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의 성과 본 변경 허가 신청소송에서 이겨야 된다는데, 이게, 준비하는 서류부터 복잡합니다. 왜 성을 바꾸고 싶은지, 성을 바꿔 쓴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일상에서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 이를 왜 재판부가 허가해 주어야 하는지 들에 대한 내용을 쓰고, 필요한 증거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가까스로 서류를 꾸며서 판사 앞에 섰더니, 내게 묻는 첫마디가 재혼하려고 그러세요?”였습니다. 엄마가 재혼해서 아이 성을 새아버지 성으로 바꾸는 게 보통인데, 재혼도 안 하면서 멀쩡한 아이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아이 생부 의사가 어떤지도 확인해야 하고, 가사 조사에, 심리에 절차가 아주 복잡하다는 겁니다.

상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성 문제는 자기 결정의 권리이지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생부 의사까지 물어야 하다니. 그 생부의 생사도 알지 못하던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를 딸아이 친구들한테 하소연하니 이 녀석들도 같이 분개하면서, ‘내 친구 이름은 송OO입니다하는 피켓을 펼쳐듭니다. 이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탄원서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졸업 앨범에 OO’으로 표기해 주었고, 아이가 물건에 쓴 이름에, 일상생활에 엄마 성을 쓰고 있다는 증거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서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성 변경 허가 판결을 받은 것은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고도 석 달이 지나서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이 마흔 넘은 육중한 몸을 얼마나 폴짝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마시면 기운이 팡팡 나는 자양강장제 박카스를 잔뜩 사서 바까스로 바꿔 둘레에 돌리던 그날의 상큼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이 성 하나 바꾸는 데 일 년 넘게 싸웠으니, 촛불혁명보다 더 질기고 오랜 혁명이었지요.

▲ 그림_ 최정규


,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진 걸 함부로 쓰고, 나쁜 짓 하는 놈한테는, 있는 힘 없는 힘 다해 이겨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럴 땐 상식 없는 게 진짜 큰 무기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거든요.

이렇게 힘자랑이 길어진 것은, <작은책> 보고 걸려 온 전화 몇 통에 마음이 속절없이 따땃해져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철벽을 거두게 되는 건, 갑질과 겁박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측은해하는 마음, 다정히 헤아려 주는 마음들 때문이잖아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인 것처럼요.

물론 그러다 철벽이 홀라당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8월호

살아온 이야기(2)


바닥을 쳤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얼떨결에 결혼이란 걸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나는 어떤 남자한테 머리채를 휘어잡혔습니다. 내 머리카락이 그렇게 튼튼한 줄을 그때 처음 알았네요. 머리채만 붙들리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집 안에서 집 밖으로 하릴없이 질질 끌려다니게 됩니다. 발로 밟히고, 차이고, 주먹으로 얼골(‘얼굴의 방언(충북))이며 눈탱이며 얻어터졌습니다. 쌍년, 개 같은 년, 아니 소 같은 년, 죽일 년, 더러운 년, 아무한테나 다리를 쩍쩍 벌리는 년이라는 소리들을 같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년들이 있다니요! 그 모든 년이 그날 밤엔 오로지 나였습니다.

둘레에 있는 건 뭐든 집어서 내리찍는 통에 옆구리며 팔다리며 온몸이 널브러졌습니다. 맞은 자리가 너무 아프고, 골통이 흔들려서 눈앞이 흔들리고, 눈물 콧물 다 쏟는 가운데, 울고불고 하는 입이 다물어질 틈이 없어 침도 질질 흘립니다. 짐승처럼 완력을 쓰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같이 짐승처럼 생존본능이 입니다. 그래서 싹싹 빌게 되지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뭐를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싹싹 빕니다. 그러면 한 대쯤 덜 맞지 않을까?

그러다 이번엔 아예 문 밖에 내몰려서 차가운 베란다 바닥에 그저 끙끙하며 벌러덩 누웠습니다. 한참을 버려져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갓난쟁이 애기가 집 안에 있으니 나만 혼자 어디 갈 수도 없습니다. 옆집 남자가 난닝구만 입고 담배를 피고 있다가 후다닥 들어가 버립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다시 머리채를 잡혀서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그 남자는 이번에는 내가 자기를 함정에 몰아넣었다고, 자기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부엌에서 칼을 찾아와 내 가슴팍에 들이대더니 죽여 버리겠다 하다가, 아니다, 네가 나를 죽여라, 내가 당한 거니까 네가 끝내라 합니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죽도록 얻어터진 뒤였는데도, 나는 어디서 무슨 힘이 났는지, 내 손에 억지로 쥐어진 칼자루를 뿌리치고 맨발로 도망쳤습니다. 그길로 근처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산발이 된 머리채와 울퉁불퉁 피멍이 든 얼골, 신발도 못 챙겨 신고 나온 내 행색을 보더니 경찰들이 무슨 일인지는 따져 묻지도 않고 그저 누가 이랬어요?” 합니다.

그런데 밤새 나를 패던 그 남자가 내 신발 두 짝을 들고서 경찰서에 들어섭니다. 그러고는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 왜 그래, 신발도 안 신고. 얼른 신발 신어.” 하고 바닥에 가지런히 신발을 내려놓습니다. 나도, 경찰들도 얼골이 하얘집니다. 저 사람이 밤새 나를 팬 그 남자라니. 짧은 침묵을 깨고 경찰이 묻습니다. “아저씨가 이랬어요? 아저씨가 이 아줌마 때렸네.” 그러고는 나더러 이 아저씨 누구예요? 남편이지요? 입건할 겁니까?” 합니다.

입건할 거냐고 묻는 소리에 나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 내 상식 창고를 가동시킵니다. 그런데 이 부실한 상식 창고에서는 좀처럼 뭐가 안 나옵니다. ‘입건이라는 말뜻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입건하면 더 큰 보복을 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가 없는 잠깐 사이에 애기를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더 큰일이니까 내가 여기서 입건이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입건은 모르겠고, 그냥 이 사람이 더 못 날뛰도록 잠깐만 붙들어 주세요. 집에 애기가 있어요. 얼른 가서 괜찮은지 봐야 돼요.”

내가 가장 믿었던, 같이 살기로 결정한 그 남자가 죽도록 나를 패던 그 밤, 상식이 없는 나는 저 깊은 곳에서 속절없이 또 물음이 떠오릅니다. 이 정도면 바닥을 친 거겠지? 이게 인생 가장 밑바닥이겠지? 도대체 바닥을 쳤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나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아빠는 보일러 기술자였는데, 말이 기술자이지 보일러를 놓는 노가다꾼이었습니다. 맨몸으로 고향을 탈출한 아빠는 배운 것도, 변변한 기술도 없어서 데모도를 하며 공사판을 떠돌다 부산에서 자리 잡았습니다. 엄마는 시골 깡촌 없는 살림에도 쌀밥 아니면 곡기 먹을 생각을 안 해서 외할아버지가 자기 몫으로 차려진 고봉밥을 부러 남겨 챙겨 준 귀한 딸이었습니다. 오로지 키와 피부만 보고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귤 하나를 못 살 형편이라서 길바닥에서 귤껍질을 주워 먹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나는 이것이 바로 인생의 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도 제대로 추스르기 전에 찾아온 다른 인생 때문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식으로 내몰리는 결혼이 바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아이 아빠가 가장 좋은 육아 파트너가 돼 줄 거라 믿고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그 남자가 역류성식도염에 걸렸을 때, 나는 이게 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삭에 퉁퉁 부은 몸으로, 역류성식도염의 고통을 이겨 내느라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는 그 남자를 안마해 주다가, 저린 발을 번갈아 디디며 , 이건가 보다, 바닥했습니다.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밥을 끊고, 음식을 끊고, 의사가 처방한 약도 가려 먹느라 한없이 야위어 가는 그 남자에게 나는 시간을 칼같이 대어 멀건 죽과 감자 넣은 된장국을 해 먹였습니다. 한 팔에는 혹시 울까 봐 아기를 안고, 한 팔로는 죽이 눌지 않게 저으면서 주걱을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드러난 냄비 바닥을 보며 저 바닥이 내 바닥이구나했습니다.

애 낳고 몸 푸는 동안, 똥에 미역이 그대로 나온다고, 미역국도 못 먹겠다고 해서 나도 미역국을 접고 같이 멀건 죽과 감자 넣은 된장국 식단에 동참했습니다. 엄마가 남해에서 공수해 온 짙고 토실토실한 미역이 베란다에 내몰려 바싹 졸아가고 있는 걸 보면서 , 저렇게 말라 가는 게 바닥인가 봐했습니다. 너무 예민해서 햇볕이 드리워지는 것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고, 애기가 우는 것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며 애기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14층 아파트에서 집어던지겠다고 소리치는 남자를 보고 있느라 몸푼 지 한 달 남짓한 내 몸에서 살이 30킬로그램이나 폭삭 빠져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때가 바닥이었을까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눈앞이 뱅글뱅글 돌고 앉아도, 서도, 누워도 어지럽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돌발성난청. 정말 딱 하룻밤 만에 거짓말처럼 오른쪽 귀가 완전히 먹어 버렸던, 이 순간이 바닥이었을까요? 어느새 늙어 버린 엄마아빠의 집으로 기어 들어가서 한없이 여린 아기와 한없이 아픈 내 몸을 추스르며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때, 잘못했다며 빌던 그 남자의 말을 한 번 더 믿어 준 것이 바닥이었을까요?

결혼하고 몇 달 동안, 닥쳐오는 모든 순간은 늘 다음 순간에게 가장 깊은 인생 밑바닥 자리를 내주는 일이 거듭되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슬그머니 화가 났다가, 에이그 가엾다 불쌍하다 이해했다가, 또 하나도 이해 안 되고 슬퍼졌다가 하면서 그 시간을 지나 보냅니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어려운 시간들이 차곡차곡 흘러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인생 가장 밑바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바닥을 쳤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토록 간절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닥을 쳐야, 그제야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추위와 깜깜한 어둠이 가장 길고 짙은 동지가 지나야 점점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 내 인생 저 밑바닥에 닿게 되는지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걸 알아야 그 순간이 왔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닥을 힘껏 굴러 벌떡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요.

인생 밑바닥, 그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깊은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습니다만, 그 순간은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나한테 기가 막힌 진단법이 있습니다.

밤새 얻어터진 그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나는 한 손에 아기를 안고 한 손에는 짐가방을 들고 그 집을 나섰습니다. 그 꼴을 하고 엄마한테 갈 수는 없어서 서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네 원룸에 기어 들어갔지요. 친구는 출근하고 빈집에 혼자 남아 있는데, 문득 기다란 전신거울 속에서 내 얼골이 보였습니다. 그 얼골은 눈에 핏줄이 서고, 입술이 터지고, 피멍이 올라 울퉁불퉁했습니다. 어찌나 못생겼는지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못생긴 얼골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어 있을 때! 바로 그때가 바닥을 친 순간입니다. 나는 부어올라 앙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흐흐흐흐웃음이 새어 나가도록 한참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섰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넘어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쭉쭉 위로만 뻗어 간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는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더 나쁜 일로 만들지 않을 힘이 생겼지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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