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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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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파견'에 해당되는 글 2

  1. 2018.08.28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1
  2. 2009.03.25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2009년 2월호)

<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태윤호/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지부 사무국장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분이라면 쌍용양회 시멘트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일 공장 중 세계 최대 규모 쌍용양회공업()은 시멘트업계 1위로 연간 300~400만 톤의 시멘트를 미국, 칠레,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8곳에 수출하는 회사다.

2007년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그해 결혼하고 겨울에 쌍용동해중기()에 입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지인분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년실업률이 점점 높아지는 시기에 젊은 나이에 지방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는 평생직장으로 삼을 만한 일터가 별로 없다. 지방에서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권, 대도시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쌍용양회에 들어간 나는 내가 자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2의 인생, 나의 새 둥지를 꾸려 갔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덟. 결혼하고 입사한 지 12년 차.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정말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IMF 이후 쌍용양회는 쌍용중기 부서를 포함한 기계, 정비, 유통 등 여러 개의 부서를 도급으로 전환시켰다. 이 내용을 입사 면접에서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다시 안정화되면 합병될 거라고 기대하였고 다른 타 회사의 대우를 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처음 원청 직원과 월급 차이는 78퍼센트 수준이었고 성과급 및 복리후생도 쌍용양회의 지침 그대로 적용되었다. 분사되었을 때 양회 직원으로 일하다가 넘어온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원청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4년쯤 지났을 때 바지사장이 갑자기 원청에서 퇴직 통보가 왔다고 했다. 왜 바지사장인가 하면 연 35~40억 원의 경상 도급을 받아 오는 회사의 사장 자리에 주주총회도 거치지 않고 원청이 보내는 사람을 앉혀 처우, 복지나 직원들의 급여 및 발령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쌍용양회 북평공장 공장장(부장이사)이 중기 바지사장으로 온다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그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기 반장이 도급계약에도 없는 A광산에서 비 오는 날 원청 관리자의 요청으로 작업자 두 명과 중장비를 가지고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낙석 사고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 우린 원청의 작업 지시를 당연시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달이 흐르고 쌍용양회에 계시다 넘어오신 퇴직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쌍용양회의 입사 동기들과 퇴직금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소송을 했다. 한평생을 다 바치고 억울하게 회사의 고통을 공동 분담 하였는데도 그들과 평등한 대우는커녕 물질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은 1심에서 지게 된다. 원청에서 도급으로 넘어올 때 아무런 서명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이어져 넘어온 것이 실수였다.

그 후폭풍이 결국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바지사장은 원청에 의해 잘려 나가고 그보다 더한 바지사장(북평공장 공장장)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한번은 원청 관리자가 자신들의 작업 지시를 묵살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여 바지사장이 동료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분은 한 달 무급과 출입 정지 공문을 받고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사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야만 했다.

또 외부 운송업체 기사가, 우리가 하역을 제때 안 해 준다고 쌍용양회에 본사에 투서를 보내 본사에서 감사조사원이 내려와서 그 시간대 근무였던 장비 운전원을 불러 감사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말에 원청 노조가 임금 협상을 하여 임금이 인상되면 우리도 똑같이 올려 줬는데, 도급이라고 끊기고 소급분도 안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겨울에는 동해시의 도로 일대, 공장 주변, 시내, 공장 안, 원청 사원아파트 앞까지 요청 오는 제설 작업은 다 했고 여름에는 원청 직원의 피서를 위한 천막과 의자 운반까지 했다. 동해시의 초··고등학교 운동장과 바닷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 등 쌍용양회의 중장비 관련 대외 업무는 우리가 도맡아 했다. 억울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발급한 건설기계 조종면허를 8개씩 가지고 있으며, 실제 그 면허에 해당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능직 사원들이다.

정말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 이 악질 같은 놈들은 조금 더 벌어먹으려고 직원들 임금 줄여 지네 배 불리고, 원청에 잘 보여 어떡하면 안 잘릴까 온통 그 생각뿐인가 보다. 누군가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를 열어 연구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머리를 깨 봐야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본에 맞서기 위해 SNS를 뒤져 우리랑 유사한 회사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 동네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승리한 사례를 보았다. 동해삼척지역에는 노동운동에 앞장서 그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난 110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쌍용양회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의 반대편에 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걱정했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느라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직원들의 한마음 한뜻이면 한 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다들 이런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런 일들이 생기면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나 위로가 그렇게 따뜻하고 위대할 순 없을 것 같다.

▲ 쌍용양회 비정규직 노동자 태윤호 씨.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지금 우리는 쌍용양회의 불법파견 및 위장도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 중이다. 노동운동의 선전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투쟁은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부림이며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의 일손을 놓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이 글을 보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 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쌍용양회지부와 강원지역 노동자들.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posted by 작은책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200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정인열/ 코스콤비정규지부 부지부장

2008년 12월 29일 파업은 475일 만에 끝이 났다. 조합원 76명 중 65명은 3개월 이내에 무기계약직 별도직군제로 고용하고, 그 밖에 11명의 고용 문제는 ‘추후’ 협의 후 합의하기로 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의 직접 고용을 투쟁을 통해 얻어 낸 이례적인 성과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11명(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패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결이 되면 그 긴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눈물이 나고 아주 감격해서 어찌할 줄 모를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냉혹한 진실 때문일까?

우리가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여의도는 소돔과 고모라같이 의인하나 없는 곳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한 가족처럼 일했던 연봉 9300만원의 정규직 동료의 외면과 계속되는 방해는 우리를 더욱더 뼈저리게 춥게 만들었다. 1800만 원 연봉의 비정규직들은 매일 아침 팔뚝질을 하면서, 눈인사도 피하며 출근하는 정규직 동료를 바라만 봐야 했다. 거기에다 타결 막판에 정규직 이기주의를 결국 드러낸 증권선물거래소(코스콤의 원청) 노조 간부들의 반대로 전원 직접 고용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날은 거래소 앞마당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분신도 못하고, 고공시위도 못하고, 어디 가서 한풀이도 못한 채 우리는 힘없이 그 자리를 떴다. 자기들만의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정규직 노동조합 운동이 결국 비정규직의 정당한 요구도 묵살해 버리는 현실을 겪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운다 한들 세상이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노동자가 저 모양이라면……’ 하는 절망에 또 절망이었다.

그래도 거래소와 코스콤 밖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은데 노동자들이 모아 주신 성금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앞으로 파업 투쟁 때보다 더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합의서가 이행될 수 있게 11명을 포함한 전원이 하루라도 빨리 복직하게 하는 것, 임금과 업무 배치 등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일,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일 등이다. 뉴스에는 타결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 또 다시 거래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상명하복 식으로 일방적 명령 전달을 받는 의사소통 구조가 아닌 모든 조합원이 자유롭게 토론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지부장은 대장이 아닌 조합원을 대표하고 조합원과 평등한 위치에 있는 그야말로 민주적인 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나긴 파업 기간 중에 깨달았고 그것이 지금도 가장 절실하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얻은 성과는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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