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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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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0.18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인 세상(작은책 2018년 10월호)
2018. 10. 18. 23:05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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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인 세상

진장원/ 한국교통대학교 교통대학원 원장

 

길을 걷다 보면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풍경이 하나 있다. 골목길에서 자동차가 오는 기색이 보이면 사람들은 얼른 구석으로 피해서 자동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것이다. 심지어 횡단보도 앞에서조차 보행자는 자동차를 먼저 보내 주고 나서야 길을 건넌다. 이렇게 자동차가 우선시되는 문화는 우리 삶 속에 너무나 깊숙이 배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동차를 먼저 보내 줘야 하지?”라는 질문도 떠올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가령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우선이지!”라고 주장하며 먼저 길을 건너려 했다가는 당장 운전자로부터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라는 욕설을 듣게 될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이나 유럽은 어떨까? 한번은 필자가 미국 여행을 가서 교통신호등이 없는 교차로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저만치에서 자동차가 다가오기에 한국에서 늘 하던 대로 자동차가 얼른 통과하기만을 기다리며 딴전 피우듯 길 건너편을 주시하고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자동차를 쳐다봤더니, 그 자동차 역시 횡단보도 앞에 정지한 채 내가 길을 건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혀 멍하게 있다가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운전자는 헤이! 당신 왜 빨리 길을 안 건너고 있는 거야? 당신 때문에 나도 못 가고 있잖아라는 의미로 팔을 뻗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는 미국인 특유의 몸짓을 하며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사태 파악이 돼서 손을 들고 무안하게 길을 건넜다. 그 후로도 횡단보도에서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기까지 의식적으로 자동차보다 내가 우선권이 있어!”라며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당초 길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원래부터 자동차가 도로의 주인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와 다른 선진국은 보행자를 대하는 태도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걸까?

사람이 우선인지 자동차가 우선인지에 대한 관념의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단적인 예가 보행 중 사망사고율이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 사망자 열 명 중 네 명 정도가 걷다가 죽은 사람이다. 반면 네덜란드와 미국은 약 한 명이다. , 우리나라가 네 배나 더 많이 보행 중에 죽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선진국이지만 일본도 3.5명이나 된다. 일본이 다른 교통사고 통계는 선진국 중 으뜸 수준이지만 보행자 사고에서만큼은 후진국 수준인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운전자들이 보행자들을 그다지 배려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절반 정도의 운전자들만 보행자를 위해 차를 세워주었다.

그럼 서구 선진국에서도 원래부터 사람이 자동차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회가 그렇듯 약자(보행자)들이 가만히 있으면 강자(자동차)들이 알아서 보호해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약자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보행권을 쟁취해 낸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도로교통법에는 본엘프라는 제도가 있다. 본엘프는 네덜란드말로 도로의 정원이라는 뜻인데, 이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동차는 보행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된다. 심지어 아이들이 이 거리에서 마음대로 뛰놀아도 괜찮다. 이렇게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 살아가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고 이걸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한다. 이 본엘프의 유래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힌다. 1970년대 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이라는 도시의 한 동네에 공사장 트럭이 통과하기 시작해서 아이들 등하교 길이 매우 위태롭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참다못한 어느 주민이 자기 집 앞을 지나는 트럭이 속도를 못 내도록 화분을 내놓았고, 이걸 본 다른 주민들도 하나둘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트럭들은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화분들 때문에 삭막하던 동네 길이 꽃으로 예쁘게 치장된 정원처럼 바뀌어 사람들이 도로의 정원’, 본엘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본엘프는 다름 아닌 주민(약자)들이 자동차(강자)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도한 시민운동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먼저 네덜란드 정부가 본엘프를 법제화했고, 이후 독일의 템포30, 영국의 홈존, 일본의 커뮤니티존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스쿨존, 실버존, 생활도로구역 등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적으로는 보행자와 자동차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으나 사람들의 의식은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 같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길의 주인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설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 본엘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첫째는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보도가 없다. 골목길에서만큼은 사람이 자동차를 피해 길 가장자리로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차량 통행의 편의를 위해 중앙에 차선을 그려 놓지 않았고 길을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자동차의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셋째는 횡단보도가 없다. , 본엘프 안에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무 때나 길을 건널 권리가 있다는 것을 시설로 운전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당한 채찍이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동차 운전자에게 너무 관대한 처벌을 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음주운전이다. 여러분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운전자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대부분 선진국은 음주운전을 형사사건 살인죄로 엄하게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시속 30킬로미터 이상 속도를 내면 안 되는 본엘프에서 이를 어기고 사고를 내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 미국 운전자들이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기다려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엄한 벌칙 때문이기도 하다. 엄격한 규칙은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습관이 되면 곧 익숙해진다. 골목길에서 천천히 다녀 버릇하면 그 속도에 익숙해진다. 세 번째는 자동차에 대한 우리 마음이 바뀌어야 된다. 요즘 내 마음에 꼭 드는 교통안전 광고가 있다. “운전자! 당신도 차에서 내리면 보행자입니다.”라는 광고다. 맞는 말이다. 평생 운전자로서만 살아가는 사람이 지구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일반적으로 직업운전자들 외에는 하루 24시간 중 아무리 길어도 서너 시간만 운전자이고 나머지는 보행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영원한 강자라도 된 양 운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꼴불견 운전자를 꼽아 보라고 한다면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어와서 길 건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횡단보도 신호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빨리 건너라는 식으로 차머리를 밀고 들어오며 위협하는 운전자, 또는 사람들이 지나가야 할 인도나 횡단보도 위에 떡하니 무단주차해 놓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아직도 지도자들의 책임감(노블리스 오블리주)이 부족한 천민자본주의 사회라고 한탄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강자의 책임의식과 관용이다. 강자인 운전자가 약자인 보행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충만해진다는 것은 단순한 교통문화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가 강자와 약자가 더불어 사는 진짜 사람 사는 맛 나는 세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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