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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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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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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

구금시설에서 의료제도의 진면목을 본다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2000명 넘는 사람이 건물 안에 있다가 그중 절반이 코로나19에 걸렸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용자 2292명 중 1133명이 확진되었다.

수용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알렸다. 지난해 말, 창살 틈새로 손을 내밀어 “살려 주세요/ 확진자 한 방에 8명씩 수용/ 편지 외부 발송 금지”라 적힌 종이를 바깥세상이 보게 한 것이다. 도움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찾아낸 비상 대책이었고, 처벌을 각오한 시위였다. 뒤이어 <한겨레>에 실린 기사는 바깥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수용자 8명이 누워 자는 좁은 방, 마스크를 지급받기는커녕 돈 내고 사기도 힘든 구매 통제, ‘열이 나고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아무런 조처를 안 해 주고 무시해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는 수용자의 편지, 확진자와 같은 방을 쓴 밀접 접촉자 180명을 다른 방으로 옮기기에 앞서 강당에 한꺼번에 모아 놓고 4시간이나 머물게 했다는 어설픈 행정은 하나같이 코로나19 방역의 기본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 차마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2020년 12월 29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 수용자들이 창문 틈으로 요구 사항이 적힌 종이를 든 손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이동수

유엔의 ‘수용자 처우에 관한 최저 기준 규칙’에 따르면 구금 기간은 수용자가 사회로 돌아가 통합되고 준법과 재활의 삶을 살게 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라야 자유를 박탈하는 처분의 주된 목적인, 사회를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재범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수용자에게 의료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수용자는 지역 주민과 같은 수준의 의료를 차별 없이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구금시설 의료는 유엔의 최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구금시설당 수용 인원이 평균 1000명이고 대다수가 30~50대 남성인데 전체 인원의 절반이 ‘환자’이며 그중 38퍼센트가 고혈압을, 20퍼센트가 당뇨병을, 15퍼센트가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2019 교정통계연보). 이 많은 환자를 진료할 인력은 의사가 두세 명, 간호사가 한두 명, 약사와 의료기사가 한 명 정도다. 간단한 의료 장비를 갖춘 ‘의료과’에서 진료하는데 의사 1인이 하루에 보는 환자가 보통 200여 명으로, 진찰과 상담을 제대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다. 외부 의료기관 진료를 수용자가 요청할 수 있으나 허가 받기 어렵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구금시설에 의료인이 부족할 뿐 아니라 고용 또한 불안정하다는 데 있다. 의사는 2~3년 임기의 계약직이거나,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뒤 또는 전문의 과정을 이제 막 마친 뒤 군 복무 대신으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사다. 불안정하게 단기 근무하는 의사는 환자를 진료할 뿐, 행정적 권한을 갖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의사가 코로나19 집단감염 위험에 대비해 방역 조치를 시급히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어도 실제 무엇을 하기는 어렵다. 마스크를 수용자에게 일괄 지급하거나, 열이 나는 수용자를 즉시 격리하거나, 다수 인원의 집합을 금지하거나, 어떤 조치든 권한이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금시설 의료가 그 나라 의료제도를 보여 준다

보건소에서 10년,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서 10년을 일했어도 나는 구금시설 현장에 가 본 적이 없다. 보건소나 지방 의료원에 관해서는 보건복지부가, 구금시설 의료에 관해서는 법무부가 관할해 서로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나눌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외국 의료제도를 견학하면서였다.미국 뉴욕주 시립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병원에서 진료하는 외에 순번에 따라 지역 의료 센터에 나가 진료하며 교도소에도 간다고 했다. “교도소(jail)?”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는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립병원 의사는 공무원으로서 정기적으로 교도소를 방문해 수용자를 진료한다고 했다.

국영의료의 나라 이탈리아에 가서 본 것은 아예 금을 긋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의료에 관한 한, 교도소 담벼락은 분리와 배제의 경계가 아니었다.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동네 일차 의료 의사, 전문의, 정신 건강 센터 활동가가 구금시설을 오가며 수용자를 진료하고 돌본다. 건강에 위험 요소가 있는지, 만성질환이 있는지, 심각한 합병증을 앓는지 등을 고려해 수용자 본인의 동의 아래 개인별 계획을 세워 의료를 제공한다. 출소를 앞둔 이에게는 구역 간호사가 따로 배정돼 필요한 도움을 준다. 구금시설 밖이든 안이든 인간으로서 건강할 권리에는 다를 바 없도록 보장한다.

이처럼 국가마다 의료제도가 다르다. 차이가 시작되는 뿌리는, 헌법이다. 사회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의료제도에 대해 헌법의 영향력이 크리라 생각된다. 헌법은 ‘국가의 형태 및 통치구조,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기본법’(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고 건강과 의료가 바로 그 기본권의 필수 요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국영의료 역시 그 나라 헌법에 뿌리를 박고 있다.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 “공화국은 건강을 개인의 기본권이자 집단 공동의 관심사로 보호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의료를 보장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그 뒤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우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헌법 정신이 빛을 보지 못했지만, 30년이 지난 1978년에 좌우 거대 양당이 타협해 집권 연합을 이루면서 국영의료법이 제정되었다. 법의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된다. “공화국이 국영의료를 통해 건강을 개인의 기본권이자 집단 공동의 관심사로 보호한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보호할 때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 헌법 정신을 그대로 받아안고 실현하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법으로 구금된 수용자의 건강도 보호한다.

그런데 어찌 된 걸까. 우리나라 헌법에는 건강과 의료에 관한 독립된 조문이 없다. 다만 분야별 권리를 밝히는 마지막 조문(제36조) 마지막 항에서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할 뿐이다. 이 짧고 애매한 글은 보건의 내용이 어떠한지, 이에 관해 국가가 무슨 의무를 지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교육(제31조), 근로(제32~33조), 사회복지(제34조), 환경(제35조)에는 하나하나 독립된 조문이 있고 국민이 누릴 권리와 국가의 의무가 자세히 적혀 있다. 우리 헌법이 유독 건강과 의료를 형식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헌법의 ‘짧고 애매함’이 현실에 투사되고 국가 행정에 반영된다. 대표적인 예가 정부 안에서 의료에 관련된 정책이나 관리·감독 업무가 여러 법률에 쪼개져 여러 부처로 나누어진 것이다. 물론 보건복지부가 주된 역할을 하지만 법무부, 국토부, 고용부, 교육부 등 다른 부처도 의료제도 일부를 관리한다.

법무부가 구금시설 의료를 관장하며 국립법무병원(공주치료감호소)을 운영한다. 국토부가 교통사고 환자의 자동차보험 진료를 관장해 연간 진료비 2조 원을 다루며 국립교통재활병원을 운영한다. 고용부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보상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을 관장해 연간 진료비 1조 원을 다루며 전국에 근로복지공단 병원 10개소를 운영한다. 교육부 또한 서울대학교병원을 포함한 10개 국립대학병원을 관리·감독한다. 중증질환의 최종 단계를 진료하는 이 병원들은 대규모 병상을 보유하고 우리나라 공공의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이에 대한 관리·감독이 교육부에 맡겨진 것은 의료 정책을 주관하는 보건복지부 업무에 상당한 제한이 된다. 실제 예는 이보다 많다.

쪼개진 체계에서는 부처 간 칸막이 너머 사정을 서로 알지 못한다. 부처마다 독자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니 행정의 일관성은 고사하고 제도 전반을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쪼개진 제도로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한다는 건 허상이다. 대학병원 의료가 눈부시게 발전해도 구금된 수용자에게 그림의 떡이고, 바깥세상 방역이 아무리 철저해도 구치소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난다. 누구나 건강하게 하려면 의료제도를 돌아봐야 한다. 전반을 책임질 총괄 체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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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30. 15:54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2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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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

 

 

병상은 많은데 왜 부족하다는 걸까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코로나19 환자가 입원할 병상이 부족하다. 11월 중순부터 환자가 급속히 늘어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날마다 수백 명씩 감염이 확인된다. 무증상자는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하지만 열이 나고 아픈 데가 있는 환자, 전부터 앓던 병이 있거나 나이가 많은 환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12월 들어 환자가 많아지니 전담 병원 입원실에 빈자리가 없다. 지금 수도권에는 병상을 배정받지 못해 며칠씩 기다리는 사람이 수백 명이다. 대기하는 동안 증세가 나빠지기도 해 환자도 가족도 방역 당국도 불안하다.

 

병상이 많아도 코로나19 환자를 받지 않아

상황을 심각하게 하는 것은 중증 환자를 치료할 병상 부족이다. 코로나19에 감염돼 폐렴이 진행되는 환자는 갑작스레 호흡곤란에 빠질 수 있어 이런 경우 초기에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 인공호흡기로 치료해야 한다. 주로 고령층 환자에게 호흡곤란이 일어나며 제때 집중 치료를 받지 못하면 그대로 사망한다. 이에 대비해 정부가 전담 치료 중환자 병상200여 개 지정해 두었는데 1210일 아침에 남아 있는 병상이 서울에 3, 경기도와 인천을 합쳐도 6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 만약 호흡곤란 환자가 6명 넘게 발생하면 누군가는 치료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 할 테니 정부 대책으로는 중대한 허점이다. 준비된 병상이 적은 이유가 병원과 중환자실이 적어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 인구당 병상은 영국보다 다섯 배, 미국보다 네 배, 독일보다 1.5배로 과잉이라 할 만큼 많다. 중환자실 병상도 상급종합병원(고도의 전문적인 의료를 시행하는 대학병원) 등 큰 병원에 약 3천 개, 병원 전체에는 약 1만 개나 된다.


우리나라 병상의 95퍼센트가 사립 병원 소유다. ‘95퍼센트라는 숫자는 의료를 거의 전적으로 사립 병원에, 다시 말해 공공이 아닌 민간 사업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가 환자 치료에 수익성을 따지는 것이다. 코로나19처럼 수익성이 낮고 위험한, 게다가 많은 의료진을 투입해야 하는 질병에 대해 사립 병원은 입원 문턱을 높이거나 아예 빗장을 건다. 크고 유명한 사립 병원에 병상이 수천 개 있어도 코로나19 환자는 손으로 꼽을 만큼 받을 뿐이다. 그러니 환자 대부분을 공공병원이 도맡는다. 주요 도시마다 겨우 하나씩 있는 지방 의료원이 감염병 전담 병원으로 지정돼 코로나19 입원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병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수익성이 부족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존폐 위기 속에서 어렵사리 공공병원의 명맥을 이어온 터라, 병상 규모가 작고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도 적어 중증 치료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정부는 우선 국립중앙의료원과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국립 대학병원에 음압격리 중환자실을 최대한 확대하게 하고 삼성, 아산 등 사립 대학병원에 협조를 구한다. 코로나19 중환자의 건강보험 진료비를 높게 정해 다른 중환자를 치료할 때보다 열 배 많은 금액을 지급하기로 하며 병상을 열어 주기를 요청한다.

 

경영 수익을 따지는 의료의 민낯

사립 대학병원은 몸을 사린다. 그 이유를 삼성의료원이 코로나19 중환자를 4명만 받겠다며 내놓은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시설 부담이다. 음압 격리 병상 4개를 만드는 데 드는 면적이 기존 병상 18개를 폐쇄해야 할 만큼 넓다고 한다. 둘째, 인력 부담이다. 다른 중환자를 치료할 때 간호사 1명이 환자 2명을 돌볼 수 있지만 코로나19 치료에는 간호사 5명이라야 환자 2명을 돌볼 만큼 인력 소요가 크다고 한다.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려 주는 표현이라 하겠으나, 그런 이유로 입원 환자를 극소수로 제한하는 것은 경영 수익을 중시하는 사립 기관의 전형적인 논리일 뿐이다. 삼성의료원은 소유 병상이 2천 개가 넘고 의대 학생을 교육하며 전공의를 수련시키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병원이다. 이와 같은 병원이 코로나19 감염증 유행의 재난 앞에서 비용을 계산하며 몸을 사리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 의료의 어두운 민낯이다. 최고의 인력·기술·자원을 보유한 병원이 국가적 위기 극복에 발을 뺀다. 국민건강보험 진료비를 받아 운영하는 병원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 치료를 남에게 떠넘긴다. 사립이라는 이유로 힘든 짐을 공공에 맡기고 자기 보호를 꾀한다.

사립 병원의 논리는 전문가 단체의 주장에도 반영된다. 대한중환자의학회가 127일에 낸 코로나19 급증에 따른 중환자 진료 체계 구축을 위한 성명서는 정부와 보건 당국에 상급종합병원 기반에서 벗어나 전담 병원 기반으로 대응하고 대형 임시 병원을 구축(체육관, 컨벤션 등 활용)하라고 촉구한다. 그 뜻을 되짚으면 정부가 더는 사립 대학병원에 코로나19 중환자 치료를 요구하지 말라는, 대신에 공공병원에 맡기고 그래도 부족하면 체육관 같은 곳을 임시 이용해 해결하라는 주장이다. 묻고 싶다. 의학회는 공공병원의 어려운 의료 여건을 과연 모르는지. 중증 호흡기 환자를 임시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보는지. 요구대로 대형 임시 병원을 짓는다면 새로 의료진이 필요한데 여기에 학회 전문의들이 참여할 건지.

공공병원이 더 큰 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이미 수도권에서는 과부하가 걸려 있다. 지방 의료원의 입원 병상을 전부 또는 대부분 비워 코로나19 환자를 입원시키고 의료진이 모두 코로나19 치료에 투입된 상태다. 입원한 환자가 호흡곤란 징후를 보여도 중환자를 받아 줄 상급종합병원을 찾기 전까지 치료를 책임져야 하니 의료진의 스트레스가 크다. 환자가 급증하면서 지자체 당국이 응급실, 분만실 등 다른 기능은 줄이거나 정지하게 했는데 여기에도 부작용이 따른다. 의료원에 의지하던 저소득층 환자를 진료해 줄 다른 병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집에서 방치되거나 상태가 나빠져 사망하기까지 한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산모, 코로나19에 감염된 혈액투석 환자를 받아 주는 곳도 찾기 어렵다. 사립병원에서는 자기 병원에 다니던 임신부라 해도 감염 확진자라고 하면 공공병원에서 분만하라며 문을 닫는다.

 

국민이 안심하는 의료가 되려면

코로나19 유행이 우리나라 의료 제도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지금까지 정부는 건강보험을 통해 필수 의료가 공급되게 하고 국민에게 의료 이용을 보장했다. 그러나 보험의 주된 기능은 돈을 모아 비용을 해결하는 것이며 의료 내용과 성격에 깊게 개입하지는 못해, 그와 같은 정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의료에 관한 국가적 관리 기능을 높여야 한다. 국민을 위한 의료, 국민이 안심하는 의료를 국가가 책임지고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의료를 사립 병원이 주도하는 시장에 맡겨둔 채 공공의 관리 체계를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자기 사업을 꾸리는 방식으로 의료 활동을 하게 했을 뿐, 공공의 이익을 높이는 의료 체계를 만들지는 못했다. 이는 일제 강점과 전쟁이 남긴 잿더미 위에서 짧은 기간에 의료 공급을 확대할 목적으로 손쉬운 방안인 민간 공급을 선택했던 과거가 남긴 결과다.

의료는 매우 넓은 범위의 학문, 기술, 활동을 포괄하는 사회적 영역이며 삶의 필수 요소다. 따라서 누구도 의료 전체를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없어 사회 공동의 힘으로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료에서 공공성은 본질로서 공동체 구성원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이에 관련해 참고할 선례가 유럽이다. 지난 세기에 그곳 나라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의료제도를 세웠다. 나라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르지만, 국민 누구나 평등하게 의료를 이용하고 건강에 관한 한 안심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감염증의 유행에도, 비록 초기 방역에 실패해 유럽 모든 나라에서 환자가 엄청난 숫자로 발생하게 되었지만, 병원 대부분이 공공병원이고 의료진 대부분이 공직자인 제도 안에서 국가적 비상 체계를 작동해 상황을 통제한다. 방역의 실패를 의료가 수습하는 셈이니 우리와는 정반대라 할 만하다.

공공성을 높여 누구나 건강하게 하는 제도, 공공의료에 관한 짧은 글로 올 한 해 작은책독자와 만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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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8. 16:06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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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봅시다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공공의료가 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면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속한 분야인 의료에 대한 비판을 담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공의료는 말 그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라 할 수 있습니다. 공공성은 소수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 두루 관계하고 유익하게 작용하는 특성이지요. 그러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란 도시에 살든 농어촌에 살든,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건강을 지키고 증진하게 돕는 의료입니다. 이러한 의료를 제공하는 활동, 기관, 제도를 모두 합하여 공공의료라 합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그런데 무슨 비판이 있느냐고요? , 우리나라 의료에 공공성이 허약하여 의료만으로는 공공성의 의미가 살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공의료의 개념이 따로 세워졌으니 이 말은 문제점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점을 살펴볼까요. 첫째, 병의원이 주로 대도시, 더 자세히는 수도권 대도시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 소도시나 읍면에서는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워요. 전국의 232개 시군 중 60곳에는 산모가 분만할 의료기관이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둘째, 건강보험제도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 주지만, 가난한 계층을 든든히 보호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 제때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심지어는 돈이 없어 건강보험료가 밀려 병의원 출입을 아예 할 수 없는 사람도 어림잡아 200만 명이나 됩니다. 셋째, 돈 되는 것과 돈 안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구분하는 의료기관이 많습니다. 척추와 관절 수술, 심장병 치료, 성형수술, 건강검진 등 돈 되는 데에는 설비 투자를 하여 확장하지만 돈 안 되는 응급, 분만, 신생아 진료, 감염병 진료, 재활, 질병 예방과 상담 등은 안 하거나 최소한만 하려 합니다. 공공성에 충실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도립 진주의료원을 없애 버린 어떤 정치인을 기억하시나요. 그런 분들은 공공성이 의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핸드백이나 자동차처럼 의료도 시장에서 사고팔면 된다고요. 소비자는 자기 용도와 취향에 맞게 필요한 걸 고를 테고 공급자는 소비자를 의식하여 의료의 내용과 질을 관리하므로 시장에 맡겨두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의료가 공급된다고, 그래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 의료의 발전을 돕는 길이고 영리 병원 등 의료 민영화도 나쁠 것이 없다고 하죠. 그러나 이 견해는 의료의 핵심적 특징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너무 가볍게 다룹니다. 의료서비스에는 수많은 정보가 포함되는데 그중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가 오간다지만, 실제 의료는 전문적인 내용이 워낙 많고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영역이 제한적이어서 소비자가 충분히 알고 고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래서 공급자인 의료인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 있는 비대칭성, 즉 기울어진 운동장이 의료의 특징입니다. 교환도 환불도 원상복귀도 불가능한 의료서비스를 기울어진 관계에서 이용해야 한다니, 으스스하지요? 그러니 의료인의 전문성, 책임감, 환자에 대한 신의가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요. 어쨌든 이러한 비대칭성을 가볍게 다룬다면, 글쎄요, 소비자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의료 시장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분들조차 농어촌 주민이나 가난한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는 서비스, 돈이 되지 않아 시장이 외면하는 서비스에 관해서는 정부가 따로 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아요. 의료의 공공성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하는 거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요? 그보다는 공공성이 의료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잠시, 서구의 공공의료를 알아보지요. 그곳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습니다. 놀랍죠? 영국에는 국영의료제도가 있어 국가가 의료 전반을 책임지고, 독일도 질병보험을 중심축으로 하여 국민 모두에게 의료를 든든하게 보장한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서유럽 국가 중 절반은 국영의료제도를, 절반은 보험 방식의 의료보장제도를 두고 있는데 국민 누구나 수준 높은 의료를 무료 또는 거의 무료로 이용하는 데에는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곳에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의료가 그대로 공공의료이기 때문이랍니다. 영어로 헬스케어(Healthcare)가 의료이자 곧 공공의료를 뜻해요. 또한 보건, 의료, 재활서비스를 다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고요. 국가적 헬스케어란 국민 누구나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폭넓게 이용하도록 보장하는 제도이며 예방과 치료와 재활을 통합하여 제공하는 제도이니까요. 이렇게 의료가 곧 공공의료인 나라, 새삼 부럽지 않습니까?

, 미국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참, 별종이에요. 국영의료도, 국가적인 의료보험도 없어 인구의 약 9퍼센트인 3천만 명이 의료보장 바깥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랍니다. 의료보험도 모두 영리적인 민간 회사가 운영하여 보험료가 매우 비싸고 보장 내용도 천차만별이라, 산모가 아이를 낳고 12일 만에 쫓기듯이 퇴원하면서 병원에 2천만 원을 냈다는 기막힌 얘기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미국이 잘사는 나라의 표준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예외적인 나라고, 특히 의료보장에 관해서는 안쓰러운 눈길을 받는 뒤처진 곳이지요.

다시, 우리나라 의료가 공공성에 충실하게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도립병원 같은 공공병원을 더 세우면 될까요? 그건 꼭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일차의료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국민 누구나 자신의 건강 전반을 돌봐줄 의사를 정하여 부담 없이 진료받고 상담하는 제도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마이 닥터라 부르는 그 의사는 환자와 꾸준히 교류하며 건강을 돌봅니다. 동네에 있으므로 환자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질병의 초기 또는 발병 전 단계에서 진료하고 상담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밀검사나 입원치료를 받도록 환자를 종합병원에 의뢰합니다.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제도로, 국민 누구나 의료를 적절히 이용하고 건강을 보호하는 데 큰 효과를 낸다고 인정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차의료 제도가 없어, 공간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 친밀한 의료가 자리 잡지 못하고 있어요. 환자는 값비싼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쏠려 동네 의사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요. 2012OECD가 한국 의료 현황을 검토한 뒤에 이 제도를 도입하기를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종합병원 중심으로 의료를 운영하다가는 고령화 시대에 중증 만성질환 환자가 급격히 늘어 개인과 국가 모두 엄청난 비용을 들이게 되리라는 우려와 함께 말이지요.

다음으로, 지방자치단체 및 시민사회가 의료와 건강에 관련하여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지금은 중앙정부가 의료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리해요. 지자체는 보건소를 운영하여 방역, 예방접종, 건강증진사업, 간단한 진료와 취약계층 방문서비스 정도를 할 뿐입니다. 의료제도에 관해 시민이 참여할 기회는 거의 없고요. 그러나 의료는 생활하는 장소 가까이에서 이용할수록 효과적이고, 건강은 생활에 밀착하여 관리할 때 증진됩니다. 이른바 생활 밀착형 의료가 필요한데 고령 인구가 많아질수록 이게 더욱 절실해요. 앞으로 자치분권이 강화되면 지방자치단체가 의료에 관련하여 상당한 책임을 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일차의료 제도를 도입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나라에서도 의료가 곧 공공의료가 되어, 공공의료 개념을 굳이 따로 정할 필요가 없어질 테지요. 우리 함께 그런 날을 상상하면 어떨까요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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