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작은책> 2017년 7월호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이발소 잔혹사


안재성/ 소설가, 경성트로이카저자



 

 

20년 전 이곳 이천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아직 젊어 염색을 안 하니 미장원 가서 커트만 하는 게 보통이었다. 염색이 필수가 되면서 염색비 싼 이발소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맨 처음 단골로 삼은 곳은 옆 동네인 우물실 마을의 작은 이발소였다.


겨우 60가구밖에 살지 않는 우물실 마을에서 혼자 이발소를 하던 아저씨는 성격 조용하고 정감 넘치는 토박이 이천 사람이었다. 논농사를 겸하고 있어 농번기면 밤에만 이발소를 열었는데, 그 집으로 포클레인 일을 가는 날이면 저녁까지 얻어먹고 머리를 깎곤 했다.


몇 년을 단골로 다니던 우물실 이발소가 문을 닫은 것은 아저씨가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설성면 면소재지의 또 다른 토박이 아저씨가 하는 이발소 단골이 되었다. 아무래도 면소재지라 손님이 제법 있다 보니 그곳에 가면 경기 남부 사람들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 비슷하니 느리고 억양 없는, 편안한 대화들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다시 이발소를 옮길 때가 된 것은 역시 그 아저씨마저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자꾸 아저씨라고 말하다 보니 좀 그렇다. 내가 나이가 먹다 보니 아저씨라 호칭하는 것뿐, 젊은이들에게는 곧 돌아가실 할아버지들이다.


설성면 소재지에는 이발소가 두 개였다.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이발소는 경상도 출신의 오십대 노총각이 혼자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님이라곤 거의 없었다. 쓰레기통 수준으로 더럽고 어질러진 데다 이발사 차림부터가 노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 없이 십여 킬로 떨어진 장호원 읍내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피시방 옆 컴컴하고 작은 공간에서, 이번에는 진짜 할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노인 혼자 일하는 이발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반년도 드나들지 못했다. 그 양반 역시 요양원에 갔는지 사망했는지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날이 미장원만 번창하니 한 번 문을 닫은 이발소는 후계자가 없이 그대로 업종 변경이다. 그런데 때마침 장호원 읍내에 새로 차린 이발소가 있기에 가 보니 내 또래 남자가 중국 동포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 부부는 솜씨가 좋은 데다 붙임성과 입담이 좋아서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손님과 친구가 되었다. 부인이 중국 동포이다 보니 근방 농촌과 공장에 일하러 온 중국 동포들이 모두 몰려와 한가할 틈이 없이 바쁘고 시끄러운 곳이 되었다. 주말이면 순서를 맡아 두고 밥을 먹고 와서도 한 시간씩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나로서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중국동포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중국이 지하철이며 기차가 한국보다 훨씬 좋다던가, 중국 신도시는 한국보다 훨씬 크다던가 하는 이야기까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니 할 말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미국 공격하지 못하게 사드를 왜 들이냐 말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중국인들이었다. 북한의 핵 생산을 걱정한다던가, 사드 설치해 봐야 아무 효과 없다고 걱정하면 모를까, 한 줌도 안 되는 약소민족께서 웬 대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지?


자기 존재의 기준이 중국인이란 점은 미세먼지 문제에서도 나온다. 중국 쪽에서 바람이 오지 않는 날이면 한국 하늘이 예전처럼 새파란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중국의 미세먼지보다 한국의 발전소 먼지가 더 문제라고, 중국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한국이나 잘하라는 식으로 떠드는데 은근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권들이야 미국을 미워하다 보니 사건마다 중국 편을 든다지만, 조선일보구독자에 이명박, 박근혜 광팬들에게 그네들의 모순은 해석 불가였다.


간간이 이런 일이 되풀이되니 유전자만 동포일 뿐 법적으로도 심정으로도, 경제적으로까지 중국인인 그네들이 싫어서 다른 곳에 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갈 만한 이발소가 없어 견디던 내게 새로운 단골이 생긴 것은 작년 겨울 촛불시위 때였다.


염색만 하는 날이라 장호원까지 가기 싫어 면소재지의 총각 이발소에 꾹 참고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박근혜 탄핵등등의 포스터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발사는 자기가 며칠째 일찍 문 닫고 광화문에 시위하러 다니는 중이라며 박근혜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 것이었다. 더 물을 필요도 없이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총각 이발소에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간판인데 실내가 너무나 훤했다. 꼭 필요한 집기 외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데다, 낯선 중년 부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하는 게 아닌가. 물어보니 총각 이발사는 가게 팔고 집에 들어앉아 맨날 술만 마신단다. 새 주인 부부는 이발 솜씨도 좋고 친절하기도 했다. 촛불동지의 몰락이 안 됐지만 기분은 썩 좋았다. 이제 먼 장호원까지 갈 일은 없어졌다. 이발사 나이도 나보다는 젊어 보이니 더 이상 이발사가 바뀌는 잔혹사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손님이 바뀌겠지.


세월이 데려가는 것은 이발사만이 아니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가 꼭 네 달을 채우고 돌아가셨다. 지난주 일이다. 사지마비 상태로 눈만 뜬 상태에서 더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다행이요, 호상이라고 다들 위로해 주었지만 겪어 보니 세상에 호상이란 건 없더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실에 들어가면 돌아 나올 때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뭔가 말을 하려고 우물거리던 그 간절한 표정이,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해져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꾸만 눈물이 돈다. 설사 백수를 채우고 편안히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해 준 부모님의 죽음은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왜 삼년상을 치렀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또 한편, 한쪽에서는 가고 한쪽에서는 오는 게 인생인가 보다. 장례 치르고 사흘째 되던 날, 큰딸이 무사히 첫 아이를 낳았다. 유리창 너머로 입을 오물거리며 하품하는 갓난아이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손자가 퇴원해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는 날인데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막판에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는데, 반가워하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어 마스크를 하지 않은 탓이다. 벌써 이 주일 넘게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이놈의 기침이 갓난아이에게 옮을까 봐 병원에 가질 못했다. 정말 안아 보고 싶었는데. 이래서 내리사랑인가 보다

posted by 작은책